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손 마사요시 (문단 편집) === 1980년대 === 그는 높은 성적 덕에 모교인 [[UC 버클리]]는 물론 [[하버드]], [[스탠퍼드]], [[MIT]] 같은 학교들로부터 대학원에 진학하여 학비와 생활에 필요한 모든 장학금을 받으며 박사과정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받았지만 졸업만 마치면 반드시 일본으로 돌아오겠다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19세 때 세웠던 인생 50년 계획의 첫 단추를 꿰기 위해 1980년 3월,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다. 미국에서 운영하던 사업 '유니슨 월드'는 친구이자 동업자였던 홍 루[* 후에 그는 [[중국]]의 대표적 통신기기 제조업체인 UT스타컴을 창업한다.]에게 넘겼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1년 6개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의 일생을 걸 40여개의 사업 아이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역시나 [[소프트웨어]] 사업. 그는 [[경제학]]과 [[컴퓨터과학]]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물론 소프트웨어를 직접 개발할 수도 있었지만, 이미 소프트웨어 시장은 미국의 거대 개발업체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그는 소프트웨어 개발 대신에 인프라(유통)를 택한다. 결과적으로 그의 선택은 매우 현명했다. 1981년 9월, 그의 고향과 가까운 [[후쿠오카현]] 오도시로 시에 위치한 허름한 2층 건물에서 직원 2명과 함께 [[소프트뱅크]]를 창업, 소프트웨어 유통, 컴퓨터 서적 출판 등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가 컴퓨터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관련 제품 전시회인 ‘컴덱스(COMDEX)’에 출품한 소프트웨어가 ‘대박’을 치는데, 이때부터 일본 벤처기업의 선구자 중 한명으로 승승장구하며 파소나의 남부 야스유키, H·I·S의 사와다 히데오와 함께 벤처 삼총사라고 불리기도 했다. 1983년 봄에 그는 몸에 이상을 느끼자 회사 [[건강검진]]에서 직원들과 같이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만성[[간염]] 판정을 받아 5년의 생존기간 판정을 받을 만큼 상태가 심각했다. 그는 병상에서 10대 시절 자신에게 큰 감명을 주었던 [[메이지 유신]]의 주역, [[사카모토 료마]]의 삶을 각색한 역사소설 '료마가 간다'를 다시 읽게 된다.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메이지 시대]]가 오기 불과 2개월 전 [[암살]]을 당해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꽃 같은 생을 마친 사카모토 료마를 보며 자신도 "남은 생존기간 동안 무엇인가 인생을 불태울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결론을 내려, 다시 삶의 의지를 불태우고 극적으로 건강을 되찾아[* 그는 도라노몬병원의 구마다 히로미쓰 박사가 창안한 '스테로이드 이탈 요법'(만성간염을 급성간염으로 변화시켜 인체 내부의 저항력을 일거에 끌어내며 치료를 도모하는 방법)을 통해 바이러스 수치가 크게 떨어지면서 간신히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1986년 5월, 회사로 복귀했다. 그 기간동안 회사는 고객들과 거래처 등에게 신뢰를 잃었고, 1984년에 자회사를 통해 시작한 상품가격 데이터베이스화 사업 실패로 인해 은행 융자 10억엔의 빚과 더불어 신뢰해 오던 직원 20명이 동시에 사표를 내고 회사를 나가서 따로 회사를 차렸을 만큼 사원들의 배신과 불신도 있었기에[* 손정의는 굴욕감을 누르며 그들을 말렸지만, 결국에는 나갔다. 그리고 이 사원들이 차렸던 회사는 얼마 못 가 문을 닫았다고 한다.] [[소프트뱅크]]는 망해가기 일보 직전에 상태였지만, 그는 회사를 정상화시킨다. 이때 손정의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1980년대 초반 일본 게임계의 아이콘이였던 [[허드슨 소프트]]의 독점유통권을 따내기위해 고생하다가 성공했는데 이것이 초기 소프트뱅크 성장의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두 회사의 입지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이후 손정의는 당시 막 자유화된 전화 서비스를 주목했는데 고객이 새로 설립된 전기 통신 회사를 이용하려면 추가로 번호를 눌러야 했다. 지역과 회사마다 요금도 다 달라서 싼 회선을 찾는 것이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전과 같은 번호를 쓰면서 자동으로 가장 싼 회선을 찾아주는 시스템을 개발하자고 마음먹고 IT기업 '포벌(Forval)'사의 오쿠보 히데오 창업자와 함께 'NCC BOX'를 개발하였다. 미국에서 먼저나온 유사품보다 훨씬 싸고 작으며 우수했다. 이 기기로 당시 일본의 통신 비용이 크게 줄었고, 소프트뱅크는 빚을 갚고도 남을 20억엔의 로열티를 받았다. [[미국]]의 거대 [[소프트웨어]] 업체들과의 긴밀한 제휴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이다. 그는 당시 벤처기업에 머물렀던 [[마이크로소프트]]와 노벨, 시스코 시스템즈 등을 발굴했다. 「PC계의 천재」라고 불린 아스키의 [[니시 카즈히코]]와[* 아스키 출판사의 설립자로 [[빌 게이츠]]와 제휴하여 [[마이크로소프트]] 제품을 [[일본]]에서 독점적으로 판매하였다. MS가 MS-DOS 이전 [[BASIC]]이 주력 상품일때 일본 시장을 개척하였는데, 당시 MS 매출의 60% 정도가 일본 시장에서 나왔을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빌 게이츠는 [[자서전]]에서도 그를 K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각별하게 대했지만, 이후 손정의에게 [[사업]]에서 밀리고 개인의 사치스러운 생활 등이 겹쳐 몰락하고 만다. 참고로 빌 게이츠는 손정의와도 친구다. 이후 [[니시 카즈히코]]는 사업을 접고 현재는 교육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대비되어 「PC계의 신동」이라고 불리던 시기도 있었다. 또 1980년대에는 니시 카즈히코가 [[아시아]]의 빌 게이츠라고 불렸지만, 1990년대 이후에는 이 호칭이 손 마사요시에게 넘어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